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티베트 불교 (문단 편집) === 조낭 === || [[파일:jf_dolpopa_lineage field_01-1.jpg|width=400]] || || 조낭의 중흥조(重興祖) 될뽀빠 || 시가쩨 근처 조모낭 지역에서 번성한 조낭은 쿤팡 툭제 쇤두(Kunpang Thukje Tsondru)가 1294년 조낭 사원을 건립하면서 시작된다. 그 이전 11세기 깔라차끄라 딴뜨라 전문 수행가였던 유모 미꾜돌제(Yu mo mi bskyod rdo rje)는 조낭에 큰 영향을 준 조상격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유모 미꾜돌제는 카쉬미르의 빤디따 찬드라나타(Candranātha)에게서 사사했다. 후캄(Hookham)에 의하면 타공의 이해는 유모 미꾜돌제가 카일라쉬산에서 깔라짜끄라 딴뜨라를 수행하는 도중 터득한 것이라고 한다. 사캬에서 계를 받았던 될뽀빠 쉐랍겔첸(Dol po pa shes rab rgyal mtshan) 대에 이르러 조낭은 융성했다. 조낭은 쉔똥(gzhan stong), 즉 타공(他空) 사상을 내세웠다. 타공이란 모든 속제를 비롯해 다른 것에 의존해 일어난 현상들, 자아와 같은 허상은 그 자성이 공(空)하지만, 그 모든 속제의 근간이 되는 법성, 일체지, 천연의 의식, 불성, 또는 청명한 빛의 마음은 공하지 않다는 사상이다. 이후 조낭은 제5대 달라이 라마 대에 이르러 정치적ㆍ사상적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중앙 티베트 지방에서 사라졌고 몽골과 암도 지방에서 명맥을 유지한다.[* 정치적 이유가 주(主)이고 사상적 문제는 부수적이다. 17세기 중반 제5대 달라이 라마와 그를 지원하는 몽골 세력이 중앙 티베트인 짱(Tsang) 지역 지배권을 두고 조낭과 충돌하면서 조낭은 겔룩 세력권인 짱 지역에서 축출된다.] 될뽀빠는 삼전법륜(三轉法輪)에 해당하는 《보성론》의 여래장 사상을 요의(了義)로 보았다. 《보성론》에 따르면 속제의 현상들은 공(空)하지만 진제에서의 공성과 함께 나타나는 비이원적(非二元的)인 불지(佛智), 광명심(光明心), 부처의 공덕 등은 공하지 않다. 이러한 견해를 기존의 중관(Madhyamaka)에 대비하여 '대중관(大中觀, Mahamadhyamaka)'이라고 명명하였다.[* '대중관'이란 표현은 타공론자(gzhan stong pa) 뿐만 아니라 자공론자(rang stong pa)들도 "위대한 중관(혹은 중도)"라는 의미로 중관 사상(특히 귀류논증 중관)을 예찬할 때 종종 사용하므로 티베트 불교에서 반드시 대중관이 타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도르지 왕축(Dorji Wangchuk)의 설명처럼, "대중관"은 겔룩(dGe-lugs)의 학자인 케둡제 (mKhas-grub-rje, 1385–1438)가 주장한 “자공(自空)이라는 대중관(大中道)”(rang stong dbu ma chen po)이나 될뽀빠(Dol-po-pa, 1292–1361)가 주장한 “타공(他空)이라는 대중관(大中道)”(gzhan stong dbu ma chen po)이라는 견지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http://naver.me/5G4k0xWb|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불성·여래장사상의 형성 수용과 변용》]]] 유식학파의 삼성설(三性說)과 제팔식설(第八識說)에 영향을 받은 점 때문에 학계에서는 타공설의 등장을 티베트 불교에서의 유식학파의 흐름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대중관'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될뽀빠를 비롯한 타공론자(gzhan stong pa)들은 그들 스스로를 진정한 중관 논사라고 생각했고,[* 될뽀빠는 《보성론》 등 《미륵오론》과 《승만경》등 여래장 계열 경전 외에도 나가르주나의 《중론》, 《찬법계송》을 자신들의 논거로 삼았다. 그들은 《찬법계송》의 "화완포(火浣布:타지 않은 직물)가 불 속에 들어가면 더럽혀지지 않고 때를 제거하면 베는 본래같이 더욱 빛나는" 비유처럼 '지혜의 불이 객진번뇌를 태워도 광명심 혹은 법계는 불변하다'는 해석으로 타공설을 뒷받침하였다.] 타공설과 유식은 다르다고 주장했다. 한편 겔룩 위주의 종파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19세기 리메(Rimé, 無山, 무종파) 운동에 참여했던 사캬, 닝마, 까규 등 비주류 종파의 스승들도 타공설의 영향을 받아 타공, 혹은 타공과 자공(自空, rang stong) 사이의 절충적인 견해를 취하였다. 각 파의 독자적인 밀교 전승은 현교의 교학적 견해가 분화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https://m.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36575024|안성두, 《티베트 불교에서의 여래장 해석 -자공설(自空說)과 타공설(他空說)의 차이를 중심으로-》]] [[https://m.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181847695|차상엽, 《연기와 공성 그리고 여래장에 대한 티벳 사상가들의 이해》]] [[https://books.google.co.kr/books?id=JqLa4xWot-YC&lpg=PP1&dq=the%20buddha%20within%20hookham&hl=ko&pg=PR3#v=onepage&q=the%20buddha%20within%20hookham&f=false|Susan K. Hookham, 《The Buddha Within: Tathagatagarbha Doctrine According to the Shentong Interpretation of the Ratnagotravibhaga》]] [[https://g.co/kgs/BY9jUQ|Karl Brunnhölzl, 《In Praise of Dharmadhatu》]] [[https://g.co/kgs/ytzoqX|Karl Brunnhölzl, 《Luminous Heart: The Third Karmapa on Consciousness, Wisdom, and Buddha Nature》 ]] 티베트의 중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겔룩의 자공과 조낭의 타공을 양 축으로 삼은 사상적 스펙트럼 안에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현교의 자공, 타공 사상과 밀교의 족첸, 마하무드라, 칼라차크라 등은 (일치하는 부분도 있지만) 별개의 전승들이므로 각각을 연계하여 해석하는 방식은 해석 주체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실 티베트 불교는 "라마 한 분 한 분이 각각의 종파이다."라는 격언이 있을 정도로 사상적 다양성이 두드러지며 전해지는 문헌의 양 역시 방대하여 학계에서도 아직 그 전모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다. 티베트의 사조 계보는 우선 4대 종파 등으로 대별된 후 다시 시대별, 계파별, 인물별로 세분화되고 더 나아가 동일 인물의 경우에도 저작이나 생애 시기에 따라 구분이 가능하다. 사상적으로 가장 대비된다고 알려진 두 종파인 겔룩과 조낭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그들 종파 내부에서도 견해 차가 없지 않다. 또한 개중에는 특정 견해에 천착하지 않고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취하는 경우도 있는데, 가령 타공을 주창한 될뽀빠는 명상 중에 자공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개념의 제거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자공'이나 '타공'같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전승과 인물마다 각기 해석을 달리하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에서는 "'흰 타공'과 '검은 타공'이 있다"는 식으로 여러 타공견(他空見)들 중 정견(正見)과 사견(邪見)을 구분하곤 한다.[* '타공'은 될뽀파 등에 의해 새로이 창안된 용어이며 이전 인도, 티베트 문헌에서는 그 용례(用例)를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공이란 용어는 겔룩의 종파주의에 대항하여 서로 다른 종파들 간의 사상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일종의 태그라인(tagline)처럼 여러 종파에서 널리 통용되었다. 대체적으로 타공은 밀교에서 주로 논하는 미세한 수준의 의식 상태를 가리킨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타공의 세부적인 의미는 이미 서술하였듯이 종파, 전승, 인물마다 차이가 있다.] 조낭의 타공과 달리 까르마 까규, 닝마 등 다른 종파의 타공은 자공에 가까운 '완화된 타공'에 해당한다. 예컨대 조낭은 여래장을 삼세(三世), 즉 시공간에 종속되지 않는 궁극적이고 불변하는 독립된 실체(rtag dngos)라고 주장하였지만, 까르마 까규는 유식에서의 의타기(依他起)의 청정분(淸淨分)과 여래장을 결합하여 부정(negation)의 토대인 '조건지어지지 않은 빛나는 마음'을 (외부의 원인과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이전 순간의 동류(同類)의 마음에 의존하여 발생하는 순간들의 연속으로 규정함으로써 연기(緣起)와 분리하지 않았고 시공간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했다. 다만 "물과 우유가 서로 섞이지 않는" 비유처럼,[* 물과 우유는 서로 화합하되 일치하지 않는다. 《섭대승론》에서도 청정한 법계(法界)의 흐름인 바른 문훈습(聞熏習)과 근본식인 아뢰야식이 서로 공존하는 양상을 물과 우유의 화합에 비유하였다. 인도 설화에 등장하는 거위 '함사'(haṃsa)가 물과 함께 섞인 우유 중 우유만을 골라마시는 것처럼, 《섭대승론》에서는 근본식은 멸하더라도 근본식이 아닌 문훈습과 같은 청정한 종자는 멸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불성 혹은 정광명은 객진번뇌에 오염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조낭의 타공과 견해를 같이 하였다. >빛나는 마음(prabhāsvaraṃ cittaṃ)은 조건지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빛나는 마음에서는 아무 것도 원인과 조건이 합쳐져 이루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 순간의 빛나는 마음의 발생은 마음의 같은 종류(sajāti)에 의해 발생한 이전 순간의 마음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 >Sajjana,《Mahāyānottaratantraśāstropadeśa》 [[https://g.co/kgs/m3YNmR|Klaus-Dieter Mathes, 《The Other Emptiness: Rethinking the Zhentong Buddhist Discourse in Tibet》〈Zhentong Views in the Karma Kagyu Order〉]] 절충적인 견해 중에는 자공설(自空說)로 분류되는 견해도 있다. 가령 미팜(Mipham)의 경우, 겔룩의 자공설처럼 일체법의 자성(自性)이 공(空)함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인식'이나 '밝음' 등 진여(眞如)의 현상적인 측면을 긍정하였다. 그러나 현상의 실체화, 개념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미팜의 견해는 타공설과도 구분된다. [[https://m.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605754509|김성옥, 《『법법성분별론』에 대한 미팜(Mi Pham) 주석의 특징》]] 미팜의 학맥을 계승한 닝마의 학승 뵈뛸(Bötrül Dongak Tenpe Nyima)은 티베트의 중관사상을 크게 (1) 조낭의 타공, (2) 겔룩의 제실공(諦實空, bden stong), (3) 닝마의 자공으로 구분하였다. 각각의 주요한 차이는 '부정 대상(dgag bya)'에서 드러난다. 조낭의 타공은 (1) 속제(俗諦)에 해당하는 현상의 자성(自性), 겔룩의 제실공은 (2) 일체법이 진실로 존재함, 닝마의 자공은 (3) 일체의 개념적 언급을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삼는다. 이제(二諦)에 대한 설명도 조낭의 (1) '진제와 속제가 하나임을 부정함(gcig pa bkag pa)', 겔룩의 자립논증 중관의 관점[* 물론 겔룩에서는 쫑카빠의 견해를 귀류논증 중관으로 본다. 그러나 미팜은 쫑카빠가 대상 그 자체가 아닌 대상이 진실로 성립하는 것만을 부정하였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자립논증 중관에 해당한다고 보았다.]에서 (2) '진제와 속제가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의식의 분별(이름, 생각 등)로는 각기 다른 두 가립(假立)된 법(法)임(ngo bo gcig la ldog pa tha dad)', 닝마의 귀류논증 중관의 관점에서 (3) '진제와 속제가 하나도 아니고 다수도 아님(gcig du bral)'으로 달라진다. 요컨대 각 파의 견해는 중관으로 대변되는 이전법륜과 유식, 여래장으로 대변되는 삼전법륜 중 어느 사상을 우위로 볼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겔룩은 이전법륜인 중관 사상, 조낭은 삼전법륜인 여래장 사상을 각각 요의(了義)로 보았고 닝마는 둘의 양립(兩立) 혹은 합일(合一)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미팜은 현상을 경시하고 공성만을 추구할 경우 자칫 단견(斷見)에 치우칠 수 있기 때문에 중관과 유식, 여래장의 결합을 통해 공성과 현상의 쌍입(雙入)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팜 학파의 연구자로 잘 알려진 더글라스 덕워스(Douglas Duckworth)는 미팜의 사상을 "쌍입(雙入, Skt. yuganaddha, Tib. zung 'jug)"으로 특징지으면서 미팜이 쌍입을 통해 사상들 간의 이상적 화합을 도모한 것으로 설명하곤 한다. 그러나 종파를 막론하고 모든 무상요가 탄트라에서 공성과 대락(大樂)의 합일인 쌍입을 핵심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덕워스나 닝마 학승들의 생각처럼 "숭죽", 즉 쌍입이 닝마만의 오리지널리티인지는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조낭빠 깔라차끄라 딴뜨라, 닝마빠 족첸의 체험적 공성과 시간의 개념을 비교하고 이를 들뢰즈의 시선에서 바라본 티베트학자 조석효의 논문도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조낭의 될뽀파가 깔라짜끄라와 여래장을 결합하여 '항상한 실재'를 상정한 반면 닝마의 롱첸빠는 족첸과 귀류논증 중관을 결합하여 '궁극적인 것의 비결정성(불확정성)'을 주장한 점, 조낭은 동시적 수행을 부정하고 점진적 수행만을 인정한 반면 닝마는 동시적 수행을 강조하는 기조 속에 점진적 수행이 병존하여 둘의 경계가 불분명한 점 등이 두 교파의 주요한 차이점이다. [[https://m.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877141289|조석효, 《공성과 아이온의 시간: 티벳 불교 수행 해석의 한 가능성》]]] [[https://books.google.co.kr/books?id=BW8QDmAPSDMC&lpg=PP1&dq=botrul&hl=ko&pg=PP5#v=onepage&q&f=false|Bötrül, 《Distinguishing the Views and Philosophies:Illuminating Emptiness in a Twentieth-Century Tibetan Buddhist Classic》]] 초(超)종파적인 성향이 강한 제14대 달라이 라마 대에 이르러서야 조낭은 티베트 불교의 정식 종파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티베트 내에서 조낭은 이단이라는 인식이 강하고 세력 또한 미약하므로, 조낭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그와 관련된 언급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 조낭보다는 오히려 불교와 거의 차이가 없어진 뵌교를 추가하여 사캬, 겔룩, 까규, 닝마와 함께 뵌교를 '티베트의 5대 종파'에 배속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인 분류이다. 뵌교의 경우 교학적 견해나 강원 제도는 겔룩과 유사하며, 그와 더불어 닝마의 족첸과 유사한 뵌교의 족첸 전승을 갖고 있다.[* 족첸의 유래에 관해서는 뵌 기원설, 닝마 기원설, 뵌-닝마 공통기원설, 외부 기원설 등 다양한 이설이 존재한다. 족첸이 뵌교나 중국 선종에서 유래하였다는 타 종파의 비판에 대해 닝마에서는 그들과의 연관성을 강하게 부정하며 족첸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강변하였다.] 비록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조낭을 정식 종파로 포용하였지만, 그와 별개로 달라이 라마 본인은 반야경을 요의경(了義經)으로 보는 겔룩의 전통적 견해에 따라 조낭의 타공을 부정하고, 일체법이 승의적(勝義的)인 차원에서 독자적 실체가 없이 공(空)하다는 자공을 견지한다. 자공론자(rang stong pa)[* 자공론자들은 스스로를 '자공론자'라고 칭하지 않는다. 타공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유(實有)를 인정하지 않는 중관학파(dbu ma pa)와 그 외 실유를 인정하는 학파들이 존재할 뿐 중관학파 내에서 자공과 타공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타공은 왜곡된 중관 내지 중관 외적(外的)인 견해에 해당된다고 말한다.]들은 불성, 여래장에 자성(自性)이 있다는 조낭의 주장이 힌두의 아뜨만과 다를 바 없다고 비판한다. 또한 붓다는 영혼이나 불변하는 자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결코 가르친 바 없으며, 불성, 여래장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은 미료의(未了義)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조낭은 미료의를 요의(了義)로 혼동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공론자에게 있어 불성, 여래장은 마음의 법성(法性)으로서 진제로는 공성(空性), 속제로는 광명(光明)으로 장차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겔룩의 불성, 여래장 정의를 보면 알 수 있듯, 겔룩 또한 다른 종파처럼 마음/의식의 법성이 밝음과 인지라는 점에 동의한다. 한편 법성, 즉 존재의 고유한 성질에도 승의제와 세속제의 구분이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밝음과 인지는 마음/의식의 현상적 특성으로서 세속제에 해당한다. 승의로서는 마음의 밝음, 인지 또한 자성이 공하다. 마치 뜨거움이 불의 고유한 성질이지만 불의 뜨거움 역시 불변하고 독립적인 실체가 아닌 것과 같다. 이처럼 마음/의식의 법성을 설명할 때 승의제인 마음의 공성과 세속제인 마음의 밝음, 인지 등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겔룩의 교학적 특징이다. 《반야경》에서 공성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 정의하듯이, 쫑카파는 공성이 단지 부정해야 할 대상의 부정일 뿐 그 외 어떠한 정립적 함의도 내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18세기의 [[예수회]] 수사로 티베트에 와서, 5년 동안 보리도차제에 따라 티베트 불교를 공부했던 이폴리토 데시데리(Ippolito Desideri)는 겔룩빠와의 대론에서 바로크 [[스콜라 철학]]의 견해에 입각한 [[제1원인론]]을 주장했다. 겔룩빠 승려들은 데시데리의 주장을 될뽀빠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